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신병교육대 입소...
몇 사단으로 가는지 알고 갔는지, 모르고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직 몸에 익지 않은 군복을 입고, 시내에서 가끔 보던, 군인들만 타고 있던 밋밋한 버스에 올랐다.
저 멀리(운동장안? 정문근처?) 입대한 장정들의 가족들로 보이는 일군의 사람들이 서성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오늘이 배치되는 날인줄 어떻게 알고 왔나 싶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고, 그 일군의 사람들 틈을 비집고 지나간다.
바깥에는 내 아들이, 내 애인이, 내 동생이 어느 버스에 타고 있는지 몰라, 이 버스 저 버스 창문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이제 진짜 가는구나.
그렇게 버스를 타고 몇 분을 갔을까.
나는 내가 배속된 사단이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몰랐다.
버스가 의정부역에 닿더니, 모두 내리란다. 기차를 타고 간단다.
헉!!!
의정부는 당시 내가 알기로, 서울보다 북쪽에 있는 도시이고, 여기서 기치를 타고 간다는 건, 강원도 아니면, 의정부보다 더 북쪽으로 간다는 건데...
(당시 나는 의정부에서도 강원도쪽으로 기차길이 나 있는 줄 알았다.)
버스에서 내려, 줄을 서고, 플래폼으로 들어섰다.
플래폼에는 이미 모자에 작대기 하나(이등병)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모두 등에 뭔가 자기들 몸집만한 이상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마 훈련을 끝내고, 자대로 배치되어 가는 군인인것 같았다.
그들이 부러웠다. 내게도 저런 때가 올까?
우리가 탈 기차가 서서히 플래폼으로 들어오고, 기차에 오르기 전에 우리를 인솔해 갈 기간병(이미 자대에 배치를 받은 군인들)이 기차에 타고 난 뒤 주의해야 할 것들을 일러준다.
대충 기억나는 것이,
- 절대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 것.
- 간식 등을 절대 사먹지 말 것.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그 사람들은 모두 다 괴물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했다.
기차를 타고,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출발이다.
도시는 점점 멀어지고, 군데 군데 논과 밭이 보인다. 가끔 도로변에 뭔가 알록달록한 시멘트 구조물들이 있기도 하고, 창밖 도로에는 헌병이란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쓴 군인들이 보이기도 한다.
저 멀리에는 무슨 무슨 부대라고 적힌 하얀 글자판이 산의 낮은 곳에 보이기도 한다.
한참을 간다.
서울에서 북쪽으로, 기차로 1시간 이상 갈 수 있는 땅이 있었나 싶었다.
드디어 내리라는 말이 들렸다.
대광리역.
생소한 이름이다. 태어나서 서울에 가 본 것도 입대할 때까지 쳐서 두 번짼데, 서울보다 더 북쪽에 있는 역 이름이야 어련할까.
간이역같이 생겼다.
내려서, 역사를 빠져나오니 그 앞길에는 군인들이 여럿 보이고, 여기 저기 명찰 달아 주는 곳, 전투모 파는 곳 등 군인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도 여럿 있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빵빠레 같은 음악 소리가 들린다.
크~ 우리를 환영(?)하는 빵빠레인가 보다.
어리버리 우리들은 역사앞에서 줄을 맞춰서 인솔자를 따라간다.
당시, 세면백(비누, 칫솔 등을 넣어두던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갈색 가방)을 옆구리에 차고, 겨드랑이로 바싹 밀어올린 다음, 인솔자의 구령에 맞춰서 발을 맞춰 걸어갔다.
조금 걸어가니, 다리 하나가 나오고, 그 건너편에 신병교육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저 곳이구나.
아직도 생각난다.
'정병관'. 신병교육대에 있던 체육관 같은 건물이다.
우리는 빵빠레를 들으며 정병관으로 모두 들어갔다.
허~거~걱~
들어가니, 저 앞의 연단 아래에는, 헌병들이 쓰던 것과 같은 철모 비슷한 것을 쓰고 있는 몇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그 철모(화이바라 부른다. 실제로는 철모가 아니다.)의 앞챙이 눈을 반쯤 가리도록 쓰고 있었고, 그 아래로 그들의 살벌한 눈빛이 빛나는 것을 느꼈다. 모두 꼼짝도 안하고 서 있다.
정말 무서웠다.
곧이어, 사단장이 환영사를 하고, 한 장교가 앞 연단 아래에 서 있던 사람들을 우리를 교육시킬 사람들(조교라 부른다. 당시 모든 조교들은 하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이라며 소개를 시켜준다.
그리곤 곧바로 소대를 나누고, 각 소대로 들어갈 차례.
다짜고짜 각 소대별 조교들은 반말에, 욕에, 발길질에 우리를 다 잡아먹을 기세로 고함치고 윽박지른다.
우리가 훈련기간 동안 지낼 중대건물은 정병관 바로 뒤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대건물까지 가는 길이 정말 멀게 느껴졌다.
가는 동안 계속 굴렀다.
앉아 일어서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TV에서나 보던 것을, 내가 직접 당하고 있다.
드디어 훈련소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2010년 3월 18일 목요일
최악의 지하철...
오늘 집에 오는 길에 탔던 지하철 1호선은 아마, 내가 서울에서 탔던 지하철 중에서 가장 최악의 지하철이 아니었나싶다. 지하철 차량이 오래되어 낡아서 최악의 지하철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지하철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 DMB나 MP3를 이어폰 없이 듣고보는 사람들(특히, DMB)이 탄 지하철
- 술취해서 마구 떠드는 어르신(?)들이 탄 지하철
- 별 내용도 없는 전화를 큰소리로 떠들면서 통화하는 사람(특히 남자)들이 탄 지하철
-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xxx들이 탄 지하철
이 외에도, '콩나물 시루같은 비좁은 차량내를 이리저리 비집고 다니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핸드폰벨이 울리는데도 안 받는 사람들' 등이 있긴 하지만, 위의 3가지는 정말^100 최악의 상황이다. 지하철안에서...
바로 위의 조건들 가운데, 오늘은 맨 위의 3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내 주변에 있었다.
앞에 서 있던(나도 서 있었다.) 어떤 아가씨인지 학생인지는, 휴대폰으로 드라마를 보는 것 같던데, 내가 집에서 TV를 볼 때 켜 놓는 볼륨량과 거의 비슷하게 볼륨을 켜 놓고 보고 있었다. 물론 이어폰 없이...
드라마에서 어떤 여자가 소리를 바락바락 지른다.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도, 드라마에 빠진것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드라마를 본다.
-> 이어폰을 잃어버렸으면 하나 사든가, 이어폰 살 돈이 없으면 집에 가서 DMB보든가, 이어폰은 없고, 당장 드라마를 보고는 싶고...그런 놀부심보를 가졌다면, 내려서 승강장에서 다 보고 타든가. 노인분들이 그러면 이해라도 하지만, 젊은 사람이 '그라믄 안대~'
내 뒤에 서 있던 남자(학생일거야 아마)는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전화로 한다. 통화상대방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잘 모르겠다. 목소리가 좀 커야 말이지... 짧게 통화하고 말았으면 내가 이런 글을 안 쓰지...
-> 제발 지하철안에서는 통화 좀 간단히 하자. 다급한 통화라면 대충 이해는 해 주겠는데, 들어보면, 별 씨답잖은 이야기뿐이다. 특히, 별 씨답잖은 이야기를 아주 길~게 하시는 남자분들. 정말...
노약자석에서 높은 음이 들려온다. 사람이 많아,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렇게 연세가 많은 것 같지는 않고, 60살 전후 정도? 누가 모르고 자기 발을 밟았거나, 툭 쳤거나 한 뒤, 미안하다고 했나보다. 그런데 그 분(?)은 미안하다고 말만하면 다냐고~ 이래서 대한민국이 발전이 없는거야~ 예의 술 마신 노인분들의 레파토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왠만하면 지하철을 타면, 반경 1~2미터 이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위에서 밝힌 3가지 부류의 철면피/몰상식자들때문에 이 쪽 노약자석에서 저 쪽 노약자석으로 옮겼다. 내 자리를.
사람들이 많아 지나가면서 연신 '죄송합니다'를 외치면서...피~식~
법정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문학의 숲 편집부/문학의 숲)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항상 지나온 과거나 미래쪽으로 달려간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장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이 순간을 회피하면 자기 존재가 사라진다.
늘 불확실한 미래쪽으로 눈을 팔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
2010년 3월 15일 월요일
보충대(의정부)입소...
드디어, 입대하는 날이다.
정확한 정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근 18년전일이니...
점심때 마지막으로 엄마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306보충대 주변에서 이리 저리 밥 먹을 만한 곳을 찾으러다니다, 내가 아무데나 들어가서 먹자고 해서, 가장 흔한 부대찌게를 먹었던 것 같다.
점심을 먹는 동안도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한 동안 사제밥을 먹을 수 없다는 슬픈(?) 생각밖에...
보충대 앞에는, 입영자들에게 팔기 위해 내 놓은 이런 저런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시계부터 반짇고리 등등
입대전에 듣기를, 그런거를 사봐야 안에 들어가면 다 뺏긴다고 사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서, 아무것도 안 사고 그냥 입구를 지나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머리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입영하는 사람, 그 외는 모두 민간인.
운동장 펜스에 입영자와 가족들이 한데모여 앉아있었다.
앞 연단에서는 꽤 계급이 높은 사람이 지휘를 하고, 그 아래에 있던 군인들이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들 운동장에 모여 있다가, 가족들과 함께 입영자가 머물 숙소를 공개한다며 전부 내무실을 한 번씩 둘러봤다.
내무실은 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숙소를 다 둘러본 후, 이제 가족과 입영자를 떼어놓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흐느끼는 소리, 잘 다녀오라는 소리,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렇게 나도 엄마와 헤어져야 했다.
헤어져서 가는 길에 엄마도 나도 서로를 돌아보고는, 엄마 눈가가 벌겋게 되어 가고 있는 것을 봤다.
그런 감상에 젖어 있던 무렵.
입영자들에게 건물 뒤쪽으로 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어색한 짧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자마자, 큰 고함소리와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다.
입영자들은 어쩔줄을 몰라하며, 그저 시키는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니기에 바빴다.
아~ 이런 곳이구나.
앉았다 일어났다 헤쳐모여 등을 하며 군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대충 줄을 서고, 들어갈 내무실별로 인원을 나눴다. 친구끼리 들어온 경우도 있는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같은 줄에 서려고 하다가 떼어지는 것도 보았고, 같은 줄에 서고 난 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는 것도 보았다.
그렇게 해서, 자대를 배치받고 보충대를 떠나는 목요일까지 지낼 내무실로 들어갔다.
입대하던 날 저녁 식사 시간.
그 전에 내무실 건물 앞에 다들 집합을 시킨다.
싸늘한 시멘트바닥에 앉아 있자니,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다.
엄마의 눈썹을 닮았다. 잠깐 꼬끝이 시려온다.
주욱 앉혀 놓고는, 왠지 군복같지 않은 군복을 입은 사람이 앞에 나와서는, 운전면허증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란다.
꽤 많이 든다. 당시에는 내 나이 또래에서 운전면허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너무 많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그 사람은 또 다시 실제 운전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 손을 들고 있고 나머지는 내리란다.
절반정도 손을 내렸지만, 역시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있다.
그 군인은 또 다시, 몇 년 이상 차를 몰아본 사람만 손을 들고 있고 나머지는 손을 내리란다.
숫자가 확 줄어든다.
내 기억에 이 때 두 사람? 세 사람? 정도만 손을 들고 있었던 같다.
그리고는 그 사람들만 일어서게하고, 어떤 차종을 몰아봤는지 묻는다.
한 사람은 트럭, 한 사람은 자가용 등등 차를 몰아봤다고 하자, 그 군인은 바로, 자가용을 몰아봤다는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바로 어디론가 데려갔다.
후에 듣기로는, 사단장인가 연대장인가 운전병으로 뽑혀갔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잠시 있으니, 좀 멋진(?) 군복을 입은 사람이 다시 앞에 나선다.
수방사에서 인원을 차출하려고 왔단다.
키가 얼마 이상인 사람은 일어서라고 한다. 아마 177cm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멋진 군복이 좋아보여서 일어서려고 하다가, 나중에 들통나면 재미없을거라는 그 군인의 협박을 진짜로 생각하고 일어서지 않았다. 내 키는 176cm.
일어서는 사람들의 키를 보니, 나보다 작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도 일어서볼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혹시 들킬까봐...
그렇게 일어선 사람들은 모두 그 군인을 따라 갔다. 그리고 그 후 보충대에 있는 동안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예상대로, 그 군인의 협박은, 그냥 협박으로만 끝이 났었나보다.
이제는 밥 먹을 시간.
개인 관물대에 있던 식판과 숟가락을 들고 식당으로 갔다.
식판의 색깔은 진한 갈색이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앞서 이 보충대를 거쳐갔던 많은 사람들이 썼던 것인지,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많다.
냄새를 맡아보았다.
코를 찌른다. 이런데다가 어떻게 밥을 받아 먹으라는거지? 싶었다.
기름기가 많은 반찬이 나오는데다가, 제대로 씻지 않은 탓이었다.
밥을 먹기 전 맡아본 냄새때문인지 낯선 환경때문인지 밥맛이 없었다.
자기 식판과 숟가락은 자기가 씻어야 한다기에 수돗가에 갔더니, 약간 뿌연 물에 담겨져 있던 엄지손가락만한 스펀지 한 장을 던져준다. 그걸로 씻으라는 것이다.
기름기 많은 반찬을 담았던 식판을 그런걸로 씻으니, 당연히 냄새가 나지.
그렇게 2박 3일동안 보충대에서 지냈다.
보충대에서 지내는 동안 별 다른 일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눠준 군복을 입고, 입고 왔던 사제 옷은 모두 갱지에 싸서 각자의 집으로 부친단다.
나는 주소를 쓰라고 나눠준 볼펜으로, 내가 입고 온 옷안에 몇 자 적어서 집에 보냈다. 원래는 그런 걸 넣으면 안되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난 건지, 군인들 눈을 피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짤막한 편지를 써서 넣었다.
(나중에 제대 후, 누나가 이야기 해 주길, 엄마가 내 옷과 그 편지를 받고 통곡을 하셨단다.)
내무실에서는, 자기 침상에 나누어 앉고는, 두발검사, 신체검사 등을 새로 했으며, 나눠준 군복을 입었다.
군복이 안 맞으면 바꿔준다고 했는데, 대부분 군복이 작지만 않으면 그냥 그대로 입고 있었고, 몇몇은 군복이 안 맞다며 바꿔달라고 했다가 욕만 얻어먹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미리 머리를 짧게 깎고 들어갔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머리를 깎지 않은 사람들은 현장에서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그리고, 보충대에서 하는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사람들은 다시 병무청에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퇴소했다.
그 때는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부럽던지...
그렇게 보충대에서 나의 첫 입대 후 며칠을 보냈다.
입영열차...
드디어, 속세(?)를 떠나는 날이다.
부산역에는 엄마와 학교 선후배들 몇몇이 나와 있었다.
나는 낮술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하는데, 이 날은 도저히 맨 정신으로 버티기가 힘들어, 결국 맥주 한 캔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잠시 후, 부산역광장에 있던 분수대에 빠졌다.
친구들이 가만히 있던 나를 그냥 들어서 넣어버렸다.
당시, 부산역에서 입대 환송식을 하면 으례 있는 일이었다.
그 역광장 분수대는 지금 없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엄마와 그리고 친구 두명과 함께 기차에 올랐다.
당시 부산에서 서울까지 무궁화호 기차비가 9900원.
친구 둘은 나를 따라 의정부까지 갈려고 기차에 탄 것이 아니라, 구포역에서 내려서 학교에 가기 위해서 기차에 탔다.
부산역에서 구포역까지 걸리는 20분남짓.
친구들이 구포역에 내리고, 나는 엄마와 둘이 자리에 앉았다.
그 때 기차에서 내려서 돌아서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너네들도 조금 있으면 군대에 갈 것이고, 그 기간동안은 잘 못 볼것이고, 제대를 해도 서로 먹고 살기에 바빠 제대로 만나지도 못하겠지...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울 수 없었다.
기차안에서는 아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술도 한 잔 했겠다...
그렇게 약 5시간 반.
서울역에 도착해보니, 당시 카츄사로 의정부에서 근무중이던 학교 선배 한 명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 선배와 같이 의정부로 가서 엄마와 함께 저녁을 먹고, 엄마는 먼저 여관에 들어가시고, 그 선배와 나는 속세에서의 마지막 술 한 잔을 더 하기 위해, 어느 술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런 저런 군대 얘기를 선배로부터 듣고는, 속세에서의 마지막 잠을 청하기 위해 여관으로 들어갔다.
이게 마지막이구나...
2010년 3월 12일 금요일
"조화로운 삶"을 읽다???
이젠 베껴쓰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구나.
이젠 줘도 못 먹는구나.
聽臥待(청와대)의 樹石室(수석실)의 한 꼴통이 전하길,
최고 대가리가 법정 스님이 지으신 ‘조화로운 삶’이란 책을 2007년에 추천했다고 하는데...
그리고, 추천사유가 '산중에 생활하면서 느끼는 소소한 감성과 깊은 사색을 편안한 언어로 쓰셔서 쉽게 읽히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고 하는데...
오호통재라~
법정스님이 지으신 책중에는 '조화로운 삶'이란 제목을 가진 책이 없는데,
이를 어찌해야할까~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가 누군지도 안 봤다는 것인지,
아니면, 법정스님이 쓰신 책이 맞긴 한데, 책을 본게 아니라 그냥 표지만 쓰~윽하고 보고는 읽은 거라고 우기는 것인지.
오호통재라~
오호통재라~
입적하신 법정스님을 욕보여서 씁쓸하고,
개그맨들 밥줄을 다 끊으놓으려는 것이 아닌가 싶어 또 한 번 씁쓸하도다.
<참고>
머 실수다 머다 말들이 많은데, 다음 링크를 따라가 보면 알 수 있다.
2008년 주간한국과 했던 인터뷰
거짓말한거를 그대로 베끼니, 거짓말이 될 수 밖에.
실수든 뭐든, 인터넷에서 한 번만 검색하면 알 수 있는 것을...쯧쯧쯧
매를 벌어요 매를 벌어.
책읽기의 즐거움...
책을 읽기는 읽어야 하겠는데, 딱히 눈에 들어오는 책이 없었다.
인터넷 서점을 봐도, 학교 도서관엘 가봐도 딱히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책이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일단 도서관엘 가서 책을 찾아보자, 그러면 어쩌다 걸려드는 책이 있겠지 싶어, 아무 기대없이 도서관을 방황했었다.
보통때는 인터넷으로 도서관 도서를 검색해서, 청구기호 등을 메모해 가서 바로 찾아서 대출을 했기 때문에 도서관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았지만, 그런 것 없이 그냥 도서관엘 가니, 도서관에서 서성대는 시간이 꽤 길어졌다. 어떤 때는 1시간 가까이 서성거린적도 있다.
가끔은 생각지도 못했던 책을 건지는 경우도 있긴한데, 열에 일곱, 여덟은 전혀 관심밖의 책들을 대출하거나, 그냥 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
사고 싶은 책도 갑자기 많아졌다.
꼭 사방이 안개로 덮힌 곳을 헤매이다 저 멀리 비치는 불빛을 보고 달려가보니 과연 안개는 온데간데 없고, 온통 푸른 하늘과 들과 하얀 구름뿐인 광야에 나선 기분이다.
어제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남겨주고 가신 많은 책들, 그리고 사랑하셨던 많은 책들.
이제야 내가 읽고 싶었던,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분이 들뜬다.
지금 바깥날씨는 곧 하늘에서 뭔가 떨어질듯한 분위기지만, 내 마음만은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다.
감사합니다. 법정스님.
이렇게 좋은 책을 이제야 읽게 되는 불쌍한 중생을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부디 극락왕생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에서도 좋은 책 많이 쓰셔서, 저같은 불쌍하고 무지몽매한 중생들을 부디 구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리...
동사무소에 가서 입대영장을 받았다.
의정부로 가란다.
이게 바로 그 동안 많은 이들의 눈물을 쏙 뽑아냈던 그 유명한 종이쪽지란 말인가.
담담했다. 어제 한 번 크게 울고 나서인지 그냥 담담했다.
그 길로 바로 학교에 갔다.
아직 아무한테도 내가 곧 군대에 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책 반납하기.
휴학신청하기.
교수님께 인사드리기
등 공적인 정리작업을 우선 하고 있었다.
내가 이 날 참 기분이 상쾌하긴 했었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나중에, 나의 입대환송식 때, 한 후배가 이 날 나를 보고 참 밝고 경쾌한 모습이어서 보기가 좋았었다고 했다.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나의 입대소식을 전하고, 여느 입대예정자들처럼 술마시고, 놀기를 며칠.
그렇게 나의 민간인 신분 기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입대영장...
이 날은 하루 종일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벼웠던 기억이 난다.
보통은 학교에서 숙식을 해결하거나, 집에 오더라도 아주 늦게 집에 왔는데, 이 날은 집 근처까지 운행하는 통학버스를 타고, 일찍 집으로 갔다.
왠지 저녁을 집에서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집에서 누나와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누나가 저녁을 먹다말고, 전화를 받는다.
누나 : '여보세요. 네 네.'
딱 여기까지 듣는데, 뭔가 불길한 에감이 엄습했다.
그 전화가 엄마한테서 온건 아니다. 누나는 엄마한테 존대말 안 한다.
친척분들이 전화를 하신거면, '여보세요' 다음에 분명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먼저 하기 때문에, 친척한테서 온 전화도 아니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람한테서 온 전화라는 것. 누구지?
그리고, 이어지는 누나의 통화.
누나 : '여보세요. 네 네. 맞는데요. 있습니다. 잠깐만요.'
헉...뭐지?
지금 집에는 누나말고 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전화는 분명 나한테 온 전화다.
월요일 저녁. 친구들도 나한테 전화할 일이 없다. 내일이면 다시 볼거니까.
방학도 지났으니, 공사장 알바하라는 전화도 아니다.(방학이 되기 전에 가끔 예전에 일했던 공사장의 건설회사 과장이 일 하라고 전화가 오곤 했었다.)
그렇다면, 그 전화를 건 사람은 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누나로부터 건네 받았다.
상대방 : '배영호씨 되시죠?. 여시 동사무손데요. 오늘 배영호씨 집에 들렀는데 아무도 없어서 못 전해 줘서 지금 연락드리는 겁니다. 입대영장 나왔습니다. 내일 동사무소에서 찾아가세요.'
크~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입대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9월 29일이란다. 앞으로 딱 2주남았다.
나는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멍~하니, 습관적으로 밥을 떠서 얼굴쪽으로 들이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냥 멍~하니...
잠시 후, 엄마가 오시고, 내일 입대영장 받으러 가야 된다고 말씀드리자, 엄마는 우리 아들이 벌써 군대가나 하시며 좋아하신다.(겉으로야 좋아하셨겠지만, 속으로야 그랬을까...)
난 내 방에 가서 그냥 방에 엎드려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그냥 멍~
조금 있다가 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엄마랑 누나가 동생한테 니 행님 군대간단다라고 말씀하신다.
동생도 내 방으로 와서, 행님아 진짜가? 언제 가는데? 라고 묻는다.
나는, 내일 동사무소에 가서 입대영장 받아봐야 안다고만 말하며, 애써 외면한다.
동생이 씻고 저녁을 먹으러 큰 방에 간 사이 나는 내방에서 그만 나도 모르게 펑펑 울어버렸다.
꺼이꺼이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동생이 밥먹다 말고 내 방으로 와서 왜 그러냐고 묻는다.
한 5분? 10분? 그리 길게 울지는 않았다.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잠시 밖에 나갔다오신 엄마 눈가도 벌겋다. 엄마도 운 것이 틀림없다.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입대영장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다른 애들은 한 2, 3개월 앞두고 영장이 나와서, 그 동안 여행도 다니고, 친척분들께 인사도 드리러 다녔다는데, 나는 겨우 2주? 누구 코에 갖다 붙이라꼬?
당장 내일부터 할 일을 생각해야 했다.
치한으로 몰리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준다고, 1학년때 그렇게 애정을 쏟아부었던 동아리일이 잘 안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다시 동아리 운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또 한 학기를 동아리일에 매달리면서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1992년 여름방학.
이번에는 좀 색다른 일을 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도전한 것이, 신축아파트에 싱크대 설치하기, 신축아프트에 창문 달기, 신발공장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과외도 잠시.
군대가기 전 마지막 방학이다 싶으면서도, 내심 내년 봄에 입대영장이 나오면, 입대전 방학을 한 번 더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로 했었다.
그리고, 1992년 2학기 개학.
이제는 진짜 모든 일에 손을 떼고, 입대전에 여행도 좀 많이 다니고, 책도 좀 읽어볼 요량이었다.
그래서, 시내 서점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후배녀석과 여행가자는 약속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지금도 기억난다.
입대영장을 받기 전 주 수요일이었다. 날짜는 1992년 9월 9일.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가기 위해 학교통학버스를 탔다. 통학버스는 구조가 좌석버스와 똑같다. 양쪽 창문쪽으로 좌석이 두 개씩 있고, 통로는 한 사람이 서 있기에 적당한 그런 구조.
역시나 많은 학생들이 차에 탔고, 앉은 학생도 있고, 서 있는 학생도 있었다.
나는 서 있었는데, 가방은 짐칸에 올려놓고, 두 손은 짐칸을 잡고 있었다. 학생이 많이 타서 통로에 서 있는 학생들은 모두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렇게 서 있을 경우 통로에는 두 사람이 등을 맞대는 형태로 겨우 서 있을 수 있었다.
버스가 한참을 달려가는데, 내 뒤에 서 있던 학생이, 그 때까지도 가만히 있더니만 갑자기 옆으로 살짝 빠지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나는 그 학생과 나의 등이 너무 붙어 있어서 그 학생이 불편해서 그런가보다라고만 생각하고, 나도 살짝 그 학생이 빠지는 반대 방향으로 빠져주었다. 조금 편해지긴 했다.
그렇게 평소와 다름없이 통학버스를 타고,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도착했다.
그리고, 내 가방을 챙겨서 내리려고 몸을 버스 출입구쪽으로 돌리려던 찰나.
앞에서 먼저 내리려던 여학생이 갑자기 내 발을 밟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그냥 운동화가 아니라 하이힐의 그 뾰족한 부분으로.
나는 살짝 인상을 썼지만, 그 여학생이 모르고 그랬나 싶어, 아무말 안하고, 그냥 나가려는데, 그 여학생이 내 발을 한 번 더 밟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그냥 밟는 수준이 아니라, 내 발을 밟고는 담배불을 끄듯이 비벼대는 것이 아닌가.
정말 아팠다.
이건 분명 고의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솓구쳤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려 그 여학생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나 : (인상쓰며) 이것 보세요. 왜 남의 발을 밟고 그러세요? 아파 죽겠구만.
그 여학생 : 그 쪽이 먼저 치근댔잖아요. 버스에서.
그러고는 같은 과 친구인지 남친인지가 그 여학생에게 그냥 가자고 그러니까 못 이기는 척 그냥 가버렸다.
(당시에는 성추행이니 뭐니 그런게 그렇게 안 퍼져 있던때라, 별 문제없이 그냥 넘어갔다.)
머라고라? 내가 치근댔다고라? 오메~
환장할 노릇이었다. 치근대다니? 내가? 왜?
위에서도 적었지만,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는 동안 내가 느꼈던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라고 하는 것은, 그 때 딱 한 번 뿐이었다. 그것도, 나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 같아, 나도 살짝 비켜주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를 치근댔다고?
아침부터 정말 열불터지는 일이 터진 것이다.
당시 수요일은 수업이 거의 교양수업이라, 나는 분통이 터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수업도 안 들어가고 동아리방엘 먼저 갔다.
동아리 방에서 탁자에 엎드렸다가, 똑바로 앉아서 씩씩대다가, 일어섰다가 앉았다가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동아리 동기들이 수업을 마치고, 동아리방으로 들어오면서, 나에게 왜 수업에 안 들어왔냐고 물었다.
나는 가슴이 터질것 같아서, 친구들에게 아침에 있었던 일들을 울분을 토하듯이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그 여학생의 인상착의를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혹시 얘들이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인상착의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여학생들은 4학년 2학기나 되어야 파마를 하거나, 하이힐 같은 것을 신고 다녔고, 정장 비스무리 한 옷도 그 즈음에야 입고 다녔다.
그 문제의 여학생은 분명 4학년 같지는 않은데, 파마를 했고 하이힐을 신고, 정장 비스무리한 옷을 입고 있었기에 나는 그 여학생의 인상착의를 기억할 수 있었다. 또 당시는 2학기초라 졸업사진 같은 것을 찍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눈에 띄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인상착의를 대충 설명하고 나니,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수근대기 시작했다.
'걔 아닌가? 그 왜 맨날 정장 입고 다닌다는 걔, 있잖아'
누구를 말하는 거지?
내가 키며, 얼굴 생김새 등을 좀 더 자세히 말하니, 그제서야 친구들이 '걔 맞네' 그러는 것이 아닌가.
친구들에게서 사정을 들어보니, 그 여학생은 학교안에서도 좀 유명한 여학생이란다. 별로 잘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맨날 정장을 입고 다니고, 다른 남학생들 몇몇도 그 여학생한테 내가 당한것과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이다.
크~ 그럼 정신병자란 말인가?
하여튼, 안 그래도 이제 곧 군대에 끌려가야된다는 생각때문에, 착잡해 죽겠는데, 아침부터 재수없는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 하루종일 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치한으로 취급받았던 수요일이 지나가고, 금요일에는 잘 아는 후배녀석과 다음 주에 지리산에 놀러가자는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등반 경로와 서로 챙겨야 할 짐들을 정하고서.
곧 다가올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한채.
입대준비...
전기대입모집에서 떨어지고, 후기모집에 붙어서 나도 이제 대학생이 된다는 기쁨에 젖어 있었다.
입학, 학과선배들과의 술자리, 동아리 가입, 동아리 활동 등 나름대로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이런 기쁨도 잠시.
곧 있으면 군대에 가야 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 내 주변에는 군대를 제대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방위가 대부분.
그래서, 현역을 가야하는 내 입장에서 군대에 관한 어떤 정보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학과에서도 현역제대 후 같이 1학년으로 복학한 형들이 있었지만, 내가 학과생활을 수업말고는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형들과 이야기 할 시간을 가질 수 없었고, 동아리에도 선배들이 있었지만, 아직 입대를 안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현역으로 입대한 사람은 만날 수 없고, 그나마 가끔 군복입고 찾아오던 선배들은 모두 방위들이었다. 난 현역판정받았는데...
그래서, 군대에 관한 정보는 tv에서 보던 게 전부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막노동.
마침 방학이라 아르바이트도 해야 되고, 마땅한 자리도 없고 해서, 집주변에 있던 냉동창고 공사현장에 가서 막노동을 했다.
그래도, 내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군대와 가까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막노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 7시 출근, 점심은 5분만에 후다닥, 저녁 6시 퇴근.
반장과 기사들의 잔소리.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 등 내가 생각할 때 가장 군대와 가까운 생활이었다.
그렇게 대학생활 1년이 지나갈 무렵인 1991년 12월경.(1992년 초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오래돼서...)
2학년을 마치고, 입대하기 위해 '입영희망원'이란 것을 병무청에 내고 왔다.
입영희망일은 1992년 12월이나 1993년 1, 2월쯤.
나의 첫 입대준비는 이렇게 끝났다.
소중함...
항상 공기가 있어 그 덕분에 살고 있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
공기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
항상 내 곁에 있기 때문에 그 고마움을 까맣게 잊고 사는 존재.
아니 어쩌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사람이 아닌가 싶다.
지난 10여년.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즐거웠고,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가장 기억하고 싶지만, 또한 가장 잊고 싶은 내 인생의 한 토막.
가장 고통스러울때는 책을 읽고 노래를 들었다.
딴에는, 불자(佛子)도 아니면서, 부처님과 스님들의 말씀을 읽었고 들었다.
아마 어머니의 영향이 컸으리라.
하지만, 부처님과 스님들의 글을 읽을 때 그 때뿐.
돌아서면, 또 예전의 나로 돌아간다.
고통스러움. 잊음.
그런 날들의 반복속에서 점점 지쳐가던 때.
갑자기 떠오른 한 분.
법정 스님.
여느 스님들보다 책을 많이 쓰신 분이었던 걸로 기억만 하고 있다가, 문득 그 분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분이 직접 쓰신 책은 아니지만, 그 분이 많은 감명을 받으셨다고 하는 300여권의 책 중에서, 약 50권의 책을 선정해서 그 책의 의미를 펴낸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문학의 숲 편집부/문학의 숲)
2010년 3월 11일.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을 받아들고, 읽어보려는 순간.
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인터넷을 통해 보았다.
나는 여지없이 무지한 한 인간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진작에 읽어볼걸...
한 번 이라도 스님의 법문을 들어볼걸...
법정 스님의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질 않았기 때문에, 스님이 쓰신 책의 내용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왜 '진작에 읽어볼걸'이라고 후회를 했을까?
그냥 다들 유명한 분이라고 하니까? 좋은 분이라고 하니까? 다들 한 번씩 그 분의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니까? 그냥 그 분의 말씀이 좋다고 하니까?
글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 속물적인 이유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지금 생각하기에 불행한 것 한가지는, 그 동안 그 분을 몰랐다는 것이고,
다행인 것 한 가지는, 아직 그 분의 말씀을 듣기에 늦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님.
이 무지몽매했던, 아니 어쩌면 영원히 이 무지몽매에서 벗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한 인간을 부디 너그러이 봐주시고, 부디 좋은 곳에 가셔서 그 곳에서 지내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말씀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끔이라도 안 좋은 곳에서 고통받고 있을 많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성불(成佛) 하셨으니, '성불하십시오'라는 인사말씀은 안 드리겠습니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그대 청춘(김열규/비아북)
누구나 또 언제나 성공하라는 보장은 없다.
애쓴 보람이 없어서라기보다 애쓴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추구함이 옳고 바르고 소망스러운 것이어서 끝내 내던지지 않고 온통 겨루고 버티고 추구한 끝에 실패가 오더라도 그것은 비장미에 넘칠 것이다.
그래서 청춘은 스스로 자기의 삶을 비극으로 드높일 것이다.
승화시킬 것이다.
실패나 좌절을 미리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소망이, 희망이 그리고 의도가 바람직한 것이라면 좌절을 걸고서라도 감연히 전진해야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 역정을 비극으로 올려 세울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젊음의 징표이고, 청춘의 꽃이다.
2010년 3월 8일 월요일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 : 조선 서얼의 꿈과 좌절, 성공과 실패(이한/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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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새로운 세상을 꿈꾼 사람들 : 조선 서얼의 꿈과 좌절, 성공과 실패 저자 : 이한 출판사 : 청아출판사 읽은 날 : 2010년 3월 8일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2058817 |
반복되지 말았으면 하는 역사
서자와 얼자. 이를 통칭해서 '서얼'이라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신분차별이 곧 법으로
정해져 있던 시대.
오르지 못할 나무를 바라보며, 분을 삭이다가 조용히 세상에서 사라지거나,
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
분을 결국 터트려 다른 이에 의해 생을 마감하거나,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자신의 업보려니 하고 조용히 살다 생을 마친
사람들.
어찌보면, 그들 모두 그런 시대에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의 업보가 아니었나 싶다.
서얼들의 신분차별에 대항하는
투쟁도 눈물겹지만, 그들을 끝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양반들의 투쟁(?) 또한 눈물겹기는 마찬가지다.
저자의 말처럼,
당시에도 어찌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양반들이 없었겠냐마는, 법으로 정해져 있기까지한 것을 자신들의 모든 것을 걸고 굳이 바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가엾고 뭔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느끼긴했겠지만.
그런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서얼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역사학에서는 해서는 안된다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해 보는 것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싶다. 시대의 억압을 뛰어 넘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을.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과연 이 이야기들이 과연 지난 과거의
이야기일뿐일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같은 양반의 피를 받았지만, '완전한 양반의 피냐 한 쪽만 양반의 피냐'를 가지고 가장
상층의 신분들마저도 이렇게 서로 반목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신분제도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분제도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폐기된 지 한 세기가 흐른 지금은?
신분제도에 관한 법도 이제는 없고,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도 없고, 형체도 없고, 아무도 인식하지도 않는 지금.
신(新) 신분제도의 혼령이 우리 주변을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2010년 3월 5일 금요일
부모가 된다는 것은...
복돼지가 밥과 맵지 않은 반찬들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끔 복돼지에게 갈치나 고등어, 제사상에 올려졌던 생선들을 먹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생선을 먹을 때면, 나는 항상 생선대가리나, 내장이 있는 배부분만 먹고 있다.
생선대가리를 열심히 먹다보니, 없을것만 같았던 생선살이 대가리에서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내장이 있는 배부분은, 내장을 걷어내면, 생선살은 거의 없지만, 잔가시때문에 내가 이것들을 걷어내고 먹는다. 나름 맛있다.
그러다가 복돼지가 먹다가 남기는 생선살을, 마지못해 먹어치운다. 뎁힌 생선은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
사과나 배 등의 과일의 심지를 즐겨 뜯는것이다. 갈비 뜯듯이.
사과나 배 등의 껍질을 벗기고, 속살은 복돼지에게 준다. 포크에 꽂아서.
그러고, 남는 심지에 붙어 있는 살들을 들고 뜯어먹는다.
맛있다.
덜익은 딸기나, 꼭지의 덜 익은 부분을 주로 먹는 것이다.
딸기를 사오면, 바닥에 깔려 있는 덜 익은 딸기는 내 차지다. 복돼지가 먹기 좋게 딸기를 잘라 놓으면, 꼭지부분에 있는 허연 부분도 내 차지다.
빨간부분만큼 맛있지는 않지만, 나름 먹을만 하다.
부모가 된다는 것...
이런 것일까?
2010년 3월 4일 목요일
헉 아프리카(김영희/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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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헉 아프리카 저자 : 김영희 출판사 : 교보문고 읽은 날 : 2010년 3월 4일 원문주소 : http://blog.yes24.com/document/2000685 |
허걱 아프리카...
'양심냉장고'와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등 공익 오락프로그램 = 쌀집아저씨 김영희PD.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공식일 것이다.
공익 오락프로그램을 만들던 사람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다는데, 왜 떠났으며, 왜 떠난
곳이 아프리카였을까?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덮썩 읽지 않았다.
관심책목록에만 올려두었다가, 나중에 서점에서 잠깐이나마 검토를 한 후 읽을
것인지를 결정하기로 했었다.
곧이어 나온, 쌀집아저씨의 M본부 귀환과 또 다른 공익 오락프로그램 기획 소식.
이 소식을
듣고는 지레짐작으로 쌀집아저씨가 아프리카에 간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 기획을 위한 의도된 아프리카행->귀국 후 책 출간 및 프로그램 기획->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과 나의 곱지않은 평가...
그랬다.
처음에는 쌀집아저씨의 아프리카행과 프로그램 기획, 그리고 책 출판 등 일련의 일들이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서점에서 책의 '오프닝'만 잠깐 보고는, 읽지 않았다.
그 후, 도서관에서 읽을 책을 찾으러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이 눈에 띄어, 빌려서 읽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반납하면
그만이라는생각으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언제쯤 그 '우물'이야기가 나오려나 기대(?)반 의심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 내가 이 책에 대해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쌀집아저씨는 책의 '오프닝'페이지에서, 뭔가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구상을 위해 아프리카로 가리라고 마음을 먹었다지만, 실제 책
내용은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떠난 아프리카 여행기, 좌충우돌 아프리카 여행기라고 할 수 있을만한 내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에세이였건만, 하마터면 나의 책에 대한(또는 사람에 대한) 선입견때문에 좋은(나의 기준에서) 여행에세이를 놓칠 뻔했었다.
이 책에서 볼 수 있었던 특이한 점은, 자신이 여행 도중 직접 그린 그림을 책에 삽입했다는 것과 많은 현지 사진들을 페이지의
절반보다 작은 크기로 책에 넣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에는 여러 가지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어서, 여느 여행에세이를
읽을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더욱 이 책에 애착이 갔던 이유는, 쌀집아저씨의
아프리칸들을 대하는 태도가 결코 그네들의 삶을 가여워하고 연민하는 것만
아니라, 그네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또
쌀집아저씨의 그네들에 대한 느낌이 너무 솔직하게 표현되어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흑인들틈에서 여행하면서 느낀 무서운 감정,
시장바닥에서, 버스터미널에서 느낀 지저분하고 더럽다는 느낌,
탈 것에서
내릴때마다 부딪혀야 했던 호객꾼들에 대해 가졌던 안 좋은 감정들,
여행이 끝난 후, 돌아서서 가는 흑인 가이드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더 쥐어주는 짠한 마음과 불성실하고 난폭한 가이드에게 가진 두려움과 적개심까지...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소득은,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책내용과 저자에 대한 선입견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게 만들어 준 것이다.
좀 더 다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그나저나, PD가 되려면, 최소한 쌀집아저씨 정도의 삽화 그리기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나...
참, PD되기 쉽지
않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