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17일 금요일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포레스트 카터/아름드리미디어

꿀벌인 티비들만 자기들이 쓸 것보다 더 많은 꿀을 저장해두지.
그러니 곰한테도 뺏기고 너구리한테도 뺏기고, 우리 체로키한테도 뺏기지.
그 놈들은 언제나 자기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아.
뒤룩뒤룩 살찐 사람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그러고도 또 남의 걸 빼앗아오고 싶어하지.
그러니 전쟁이 일어나고...
그러고 나면 또 길고 긴 협상이 시작되지.
조금이라도 자기 몫을 더 늘리려고 말이다.
그들은 자기가 먼저 깃발을 꽂았기 때문에 그럴 권리가 있다고 하지.
그러니 사람들은 그 놈의 말과 깃발 때문에 서서히 죽어가는 셈이야.

Do you kin me? I kin ye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I kin ye’는 이해한다는 뜻이다.
이해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원래 친척(kinfolks)이라는 말은 이해하는 사람, 이해를 함께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쓰였다고 한다.

2011년 6월 15일 수요일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레스트 카터 저, 조경숙 역 / 아름드리미디어 / 1998

제목 :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저자 : 포레스트 카터 저, 조경숙 역
출판사 : 아름드리미디어
읽은 날 : 2011년 6월 10일
원문 : http://blog.yes24.com/document/4392012


못보던 책이 거실 책꽂이에 꽂혀있길래, 아내에게 물어봤더니, 아내가 결혼 전 읽었던 책이란다. 마침 읽을 책도 바닥나고, 아직 책 주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디언의 삶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갖고 있던 나는 무슨 이야기일까 싶어 아내에게 책 내용을 묻지도 않은 채 덜컥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1998년판 책.

이 책의 영문제목은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다.
‘Little Tree’, 즉 ‘작은 나무’는 저자의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가 저자를 부르던 이름이다.
인디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어떤 사물이나 사건의 명칭 등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애초에 이 책의 제목은 ‘할아버지와 나(Grandpa and Me)’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이었던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속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자전적 소설이다.

인디언 혈통의 저자, 포레스트 카터.
어릴 적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는데, 으례 인디언의 고난에 찬 삶이나 철학, 그리고 인디언 삶의 낭만 등을 적어 현대인들의 물질에 찌든 삶 등을 비판하는, 이러 저러한 교훈을 주려고 쓴 책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이 책에는 그런 교훈을 줄 만한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어릴 적 부모를 여읜 저자가 인디언인 조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느끼고 배운 것들을 적은 글이었다.
그냥 그 뿐이었다. 이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책을 중간 쯤 읽고 난 후부터는 자꾸 이미 읽었던 부분을 다시 넘겨가면서 보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딱히 교훈을 줄만한 내용이 없는 것 같은데도, 앞에서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신 말씀, 행동 등이 눈에 밟혀 자꾸 되돌아 가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깨달았다.
이 책의 내용이 현대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인디언들의 삶과 현대인들의 삶을 비교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디언의 삶이 더 나은 삶이다라는 주장도 없고, 그네들의 삶이 너무 처절하다고 울부짓는 내용도 없고(눈물의 여로 부분에서는 울뻔했다.), 그 누구를 원망하는 글도 없고,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직접적으로 제시해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부모와 작은 나무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 그 모든 것이 다 담겨있기에,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굳이 이 책에서 그 ‘교훈'이란 것을 일부러 찾고 싶지 않다.
이 책의 여운, 그 한 가지만 간직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다.
따뜻함, 따뜻함.

이 책을, 딸아이가 혼자서 글을 읽을 수 있고,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말없이 건네주고 싶다. 아니, 그냥 딸아이가 볼 수 있는 곳에 그대로 꽂아두고 싶다. 언젠가 한 번 쯤은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메마르고 메말라,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질 흙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 같던 내 마음에 이 책은 분명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슬비 같은 존재였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어떤 광역시의 이상한 버스. 3X1번 버스...

어떤 광역시로 월요일 아침에 출근한다.
그리고, 일주일을 어떤 광역시에서 일하고, 금요일 저녁에 경기도에 있는 집으로 간다.
물론, 이용하는 교통편은 대중교통이다. 지하철, KTX, 버스...
이렇게 근무하기를 벌써 5개월째.

월요일 아침에 어떤 광역시의 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가서, 내려서,
그 이상한 3X1번 버스를 탄다.

버스가 정류장에 서고, 승객들이 타고, 다시 출발하기까지 과정을 간략하게 써 보겠다.

버스를 기다린다.
저 멀리서 버스가 온다.
내 앞에 버스가 선다.
버스 앞문이 열린다.
이미 타고 있는 승객이 많아, 앞문 안쪽에 있는 교통카드 리더기에 교통카드를 대기도 어렵다.
내 앞에는 타려고 안간힘을 쓰는 승객들이 한 사람씩 올라서고 있다.
이러다 버스를 못 타는 건 아닌가, 지각하는 건 아닌가 초조해한다.
나는 버스 뒷문쪽을 본다.
앞문쪽보다는 훨씬 여유롭다.
열려있는 뒷문으로 간다.
뒷문으로 버스에 오르고, 교통카드를 리더기에 댄다.
버스 기사가 한마디 한다. '거~ 뒷문으로 탄 사람 빨리 내리세요. 앞문으로 타세요. 앞문으로.'
나도 응대한다. '찍었는데요~'
이번에는 버스 기사가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한다. '뒷문으로 탄 사람 빨리 내리라니까요~'
나는 머쓱해하며 다시 앞문으로 간다.
여전히 내가 디디고 설 공간이 없다.
그래도 타야한다. 이미 찍었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올라선다.
다행히 내가 간신히 서 있을 공간은 있었다.
여전히 앞문쪽에는 아직 못 탄 사람이 몇 사람 있다.
버스에 못 탄 사람들은 안절부절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버스 기사가 두 손을 턱을 괴고 앉아있다.
뒤쪽으로 좀 들어가라는 방송을 안한다.
다음 버스가 금방오니 못 탄 사람들은 다음 버스를 이용하라는 말도 안한다.
타려면 타고 안탈려면 말라는 건지, 그저 앞 문 밖에 사람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러고 있다.
턱에 두 손을 괴고 있다.
몇 사람은 이 버스를 타기를 포기한 것인지, 다른 버스를 타고 갈 요량인지, 뭔가를 보고는
급히 뒤쪽으로 뛰어간다.
드디어 앞 문 밖에는 타려는 사람이 없다.
이제 문을 닫고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에 더 이상 승객이 탈 공간이 없다면, 다음 버스를 이용하라고 하고, 내릴 승객만 내리고 출발하면 된다. 물론, 이 경우 못 탄 승객은 화가 날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떻게 해 봐도 탈 공간이 없는데...

버스 뒷쪽에 공간이 있다면, 안내방송이나 육성으로 조금씩 들어가 달라고 하면 된다.
물론, 승객들이 순순히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쨋든 들어가달라고 하면,
몇 사람 정도는 들어가려고 노력을 하기 때문에, 최소한 몇 사람 정도는 더 탈 수 있을 것이다.

뒷쪽에 공간이 있음에도 조금씩 들어가달라고 몇 번 이야기를 해도 안된다면, 타려는 승객들을 뒷문으로 타게 해도 될 것이다.
물론, 뒷문으로 타면 안된다는 법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이 버스 기사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타고 싶은 사람은 타고, 다른 교통편 이용할 사람은 다른 교통편 이용하고, 더 기다릴 사람은 더 기다리고...
하여튼 앞문쪽 앞에 타려는 사람이 더 이상 안 보일때까지 오로지 두 손을 턱에 괴고 앉아있다. 출발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정류장에 있는 버스 도착시간알림판에 나오는 도착시간보다 항상 10~20분씩은 늦게 온다. 그러면, 버스 기사는 왜 있지? 요즘 많이 나오는 자동운전시스템을 쓰면 될 것을.

중간 중간 사람의 판단이 필요할 때가 분명 있다. 그래서 사람이 운전을 하는 것이다.
그런 판단을 안 하려면, 집에서 잠이 더 잘 것이지, 왜 운전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쩝~

2011년 6월 2일 목요일

내려놓음

내려놓기...
욕심을 내려놓기.

다들 어렵다고들한다.
욕심을 내려놓기가.

그래서, 나는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욕심 내려놓기를.

그런데 한 번에 내려놓아지지 않았다.

마음속에서 욕심을 꺼낸다.
아직 욕심은 나의 손에 있다.

나의 손에 있던 욕심을 땅에 내려 놓는다.
이제 욕심은 땅과 나의 손에 동시에 닿아있다.

땅에 놓인 욕심에서 나의 손을 떼어낸다.
이제 욕심은 오롯이 땅하고만 닿아있다.
하지만, 아직 욕심은 나의 발 바로 앞에 있다.

땅에 놓인 욕심을 뒤로 하고 걸어간다.

비로소
나는 욕심을 내려놓았고,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욕심을 버렸다.
나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나는 어디쯤 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직 내 욕심은 발 아래에 있다.
내 욕심은 그 만큼 나와 떨어져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아직 욕심을 마음에 품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말하고 싶다.
나를 보지말고, 나의 발 앞을 보라고.
나의 욕심은 이미 나의 발 앞에 있다고.
이제 뒤돌아서서 가는 것만 남았다고.

사람들은 나의 발 앞과 나의 마음속을 혼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꺼내놓지도 않은 욕심을 이미 발 아래에 두었다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판단되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욕심을 내려놓았고
그 욕심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거면 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은 내가 욕심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이 내게서 볼 수 있다는 그 욕심은,
내 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욕심이 비춰진 것이라고.
그 욕심은 내 것이 아니라 당신들 것이라고.